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전 세계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사랑하는 명화 중 하나로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 그림의 특징, 그 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순차적으로 다뤄지는 내용을 통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세계에 한 발 더 가까이 가게 될 것입니다.
1.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게 된 배경
<최후의 만찬>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걸작 중 하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어떻게 이런 작품을 남기게 되었을까?'라는 작품 배경에 대해 누구나 한 번쯤은 궁금증을 가져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작품의 배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년 피렌체 공화국 토스카나의 '빈치(Vinci)'에서 태어났습니다. 변호사인 아버지와 농민이었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그는 14살 즈음 아버지가 그의 재능을 발견하면서 피렌체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안토니오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공방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 후 생을 마감한 1519년까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시대를 대표하는 미술가이자 과학자이자 기술자로 그림, 건축, 의학, 과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큰 업적을 남겼고, 지금은 이탈리아를 넘어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가장 대중적인 화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최후의 만찬>을 작업할 때만 해도 그 정도의 명성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의 집과 가까운 피렌체를 근거로 작품활동을 했지만 그 시대 예술가들을 후원하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후 밀라노로 활동지를 옮긴 그는 밀라노의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후원을 받게 되었으나 이렇다 할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공작이 후원하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 식당의 벽화를 의뢰받게 됩니다. 그는 노트에 '나는 기적을 행하고 싶다'라고 수없이 적으며 작품을 완성했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이 작품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인정받겠다는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1495년 초 작업을 시작했는데 귀족이나 일반 사람들의 감상을 목적으로 한 작품이 아니라 수도생들의 경건한 삶을 위한 그림이어야 했기 때문에 어떤 주제로 그릴지 수없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민 끝에 하루 세 번 식사를 위해 찾는 식당과 가장 잘 어울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만찬 모습을 그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만찬 장면을 그린 그림들은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실력을 반드시 인정받겠다는 강한 의지, 의학, 과학, 예술에 이르기까지의 지식을 총 동원하여 1497년에 가로 880cm, 세로 460cm의 벽화를 완성하였습니다. 그 작품이 바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걸작이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최후의 만찬>입니다.
2. '최후의 만찬'의 특징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이전에도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만찬을 그린 그림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된 데는 이 작품만이 갖는 고유한 특징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생동감 넘치는 인물묘사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성경 속 최후의 만찬 장면을 상상하며 12 제자의 표정, 손짓, 행동 등을 통해 제자들의 감정까지 섬세하게 묘사하였습니다. 그림을 보면 베드로는 손에 칼을 쥐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벨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다는 끼어든 베드로를 보며 몸을 젖히고 있고 손에는 주머니를 쥐고 있는데, 이를 통해 유다가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스토리를 담아 생생하게 각 인물의 특징을 표현함으로써 인물 뒤에 후광을 넣거나 이전에 최후의 만찬을 그렸던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나 기를란다요처럼 유다를 식탁 건너편에 그리는 구조를 따르지 않고도 12제자를 효과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시장, 마을, 궁정 등을 다니며 수없이 스케치를 하였고, 특히 예수님을 판 유다의 욕심 많고 사악한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밀라노 빈민가를 찾아다녔다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인물묘사에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더해 그의 해부학적 지식을 활용해 인물을 정교하게 표현함으로써 영화 속 움직이는 식사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평면의 그림을 입체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둘째는 절묘한 원근법과 빛의 사용입니다. <최후의 만찬>이 그려지던 시기에는 지금처럼 원근법이라는 기법이 대중화 되기 이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그림 속에서 다양하게 원근법을 사용하였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중심으로 12명의 제자들이 6명씩 좌우로 배치하였고, 그 6명의 제자들도 다시 3명씩 두 그룹으로 묶어 대칭을 이루도록 묘사했습니다. 또한 테이블, 예수님과 제자들, 벽, 천장, 창의 크기와 모양을 보면 그림의 뒤쪽으로 갈수록 점점 더 작아지며 좁아지도록 표현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 뒤쪽의 세 개의 창은 약간 어두운 내부 공간과 달리 환한 빛이 들어오는 느낌인데, 이 창을 예수님의 머리 뒤쪽에 배치함으로써 예수님의 중심점으로 그림이 퍼져나가며 입체감과 공간감을 더 극대화시켰습니다. 셋째는 이렇듯 완벽할 것 같은 그의 그림이 보존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선명한 색 표현이 가능하고 이후 수정도 가능하도록 달걀노른자에 안료를 섞는 실험적인 방법인 템페라기법으로 그림을 그려 생동감 넘치는 그림을 완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채광이 부족하고 통풍이 잘 안되어 습도가 높은 식당에 그린 벽화였기 때문에 쉽게 벗겨져 이후 수차례 복원을 거치는 바람에 처음 느낌을 그대로 살리는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레오나르도가 처음 그렸던 <최후의 만찬>의 생생함을 온전히 느끼기 어렵다는 점이 가장 큰 아쉬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3. 그 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과 전시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은 <최후의 만찬>과 함께 어떤 작품을 가장 많이 떠올릴까요? 아마도 <모나리자> 일 것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술분야 외에도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고 이와 관련된 메모, 스케치 등을 노트에 기록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 기록물을 통해 그의 업적과 연구의 과정들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화가로서 그가 남긴 작품은 17점 밖에 되지 않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다른 작가들과 작품 수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는데,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더 높은 희소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의 몇 안되는 작품 중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이 바로 <모나리자>입니다. '모나'는 부인이라는 뜻이고 '리자'는 주인공의 이름입니다. 즉 리자부인을 그린 그림인데, 원근법의 활용, 자연스러운 측면묘사 등 그의 독창적인 화법이 잘 드러난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특히 이 작품에 대한 다른 기록이 없기 때문에 '<모나리자> 속 여인은 왜 눈썹이 없을까?', '그림을 완성한 후 왜 주인에게 주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가지고 다녔을까?' 등의 궁금증과 사람들의 상상이 더해져 지금까지도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특별한 작품입니다. 그 외에도 <기마상>, <암굴의 성모>, <성 모자와 성 안나>, <앙기아리 전투> 등의 작품이 있는데, <최후의 만찬>이나 <모나리자>와 같은 명성은 아니지만 그가 남긴 몇 안되는 작품 중 하나이기 때문에 현재에도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은, 미국의 폴 게티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내셔널 갤러리, 유럽의 피츠윌리엄 박물관, 대영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바티칸 미술관, 피렌체 미술관, 영국 왕실 컬렉션, 호주의 호주 국립 미술관 등에 전시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기획전이나 미디어아트 등을 통해 그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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